통장이 비어가는 속도
청약통장 가입자 수가 2600만명 아래로 떨어졌다. 올해 상반기에만 약 30만명이 이탈했다는 한국부동산원의 집계다. 분양가 상승과 대출 규제가 겹치며 '청약 무용론'이 번지고 있다. 당첨되어도 집을 살 수 없다면 통장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다. 증시 랠리가 이탈 심리를 부추긴 면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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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약통장은 한국 주거정책 특유의 장치다. 매달 일정 금액을 불입하면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할 기회를 얻는다는 약속, 이것이 이 통장에 담긴 사회적 계약이었다. 1977년 청약예금 제도로 출발해 반세기 가까이 이어온 시스템이다. 정부 입장에서 청약통장은 주택도시기금의 핵심 재원이기도 하다. 가입자들이 묶어둔 돈으로 공공주택을 짓고, 정책대출을 운용한다. 그러니 청약통장의 이탈(離脫)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주거정책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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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도시기금의 형편도 녹록지 않다. 4년 전 49조원에 달하던 여유자금이 14조40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요자 대출은 같은 기간 2.9배로 불었다. 디딤돌·버팀목 같은 특례대출에 전세사기 피해 지원까지 겹치며 기금이 '정책 쌈짓돈'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새 주거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재원은 으레 이 기금에서 나왔다. 정작 본래 목적인 주택건설용 대출은 뒷전으로 밀린다. 재원의 고갈(枯渴)은 곧 정책 여력의 소진이다. 고양창릉 나눔형 분양에만 2조4000억원을 기금에서 끌어와야 한다는 전망이 나오는 터라, 기금 보강 논의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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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약속 또한 삐걱거린다. 2021년 이후 사전청약이 진행된 수도권 공공택지 가운데 열 곳 중 일곱 곳에서 본청약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다는 조사가 있다. 전세금을 빼 계약금을 마련해둔 사전청약자들은 입주 시점을 알 수 없어 속을 태운다. 정부가 공급 속도를 높이겠다고 거듭 약속해도, 이미 착수한 물량조차 일정이 밀리는 현실 앞에서 신뢰는 닳는다. 한편 국토부는 신규 주택 공급지 인근에서 법인 명의 대규모 매수, 계약일 허위 신고, 명도비 누락 등 346건의 위법 의심거래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공급 발표가 실수요자보다 투기 세력에게 먼저 신호로 읽히고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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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약통장을 해지하는 사람이 늘수록, 남은 가입자의 당첨 확률은 산술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당첨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들, 치솟은 분양가와 조여드는 대출 규제 앞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사다리는 있되 오를 수 없는 형국이다. 전용 40제곱미터 이하 초소형 아파트에 2030세대가 몰린다는 소식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에서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이 평형대 거래가 전년 동기 대비 48퍼센트 늘었다고 한다. 대출 한도 안에 들어가는 작은 집이라도 잡겠다는 절박함이 읽힌다. 반세기 넘게 이어온 청약 시스템이 지금처럼 정당성을 의심받은 적이 있었던가. 통장이 비어가는 속도와 기금이 마르는 속도가 경합하는 지금, 누군가는 끝까지 남아 운을 쥘 것이고, 누군가는 일찌감치 떠나 다른 방식으로 지붕을 찾을 것이다. 다만 그 선택지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역설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