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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날의 장부

부루팡 富樓房 · 연구인 · 2026-10-09

1085년 겨울,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는 신하들을 모아 나라 안의 모든 토지와 가축과 사람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측량줄이 들판을 훑었고, 기록은 장부로 묶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둠스데이 북, 곧 심판의 날의 장부라 불렀다. 아무도 장부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9백 년쯤 지난 2026년 10월 6일, 대한민국 행정안전부가 국무회의에서 공유재산을 5년마다 전수조사하는 법안이 의결됐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2024~2025년 시범사업에서 공유재산 대장과 부동산등기부·토지대장·건축물대장을 대조해 약 15만7000건, 20조원 어치의 숨은 재산을 찾아냈다. 대장에 없던 땅이 드러나고, 미등기 재산이 정비 대상에 올랐다. 전문기관이 매년 관리 수준을 진단하고, 공유재산 정보시스템이 공간정보와 맞물려 돌아간다. 재난이 나면 지방의회 동의 없이도 공공 건물을 이재민의 임시 주거로 쓸 수 있게 절차도 풀었다. 국가가 장부(帳簿)를 정확히 세는 일이 복지의 속도가 되는 시대다.

같은 날 국토교통부는 전세사기 피해자의 회복에 최소한의 바닥을 깔았다. 11월 13일부터 경·공매로 돌려받은 돈이 임차보증금의 3분의 1에 못 미치면 정부가 차액을 지원하는 최소보장제가 시행된다. 보증금 1억5000만원짜리 피해자가 경매 배당과 차익으로 3000만원만 회수했다면, 최소보장금 5000만원에서 모자란 2000만원을 채워준다. 경·공매가 끝나기 전에 돈을 먼저 지급하는 선지급-후정산은 신탁사기 피해자에게 열린다. LH가 신청을 받아 90일 안에 지급 여부를 통지한다. 장부의 언어로 말하자면, 개인이 감당하던 손실을 국가의 공적 장부로 옮겨 적는 일이다.

그러나 시장은 장부의 바깥에서 움직인다. 서울 아파트값은 87주 연속 올랐다. 지난주 상승률은 0.12%로 6주 만에 다시 커졌다. 강남3구와 용산은 하락했지만, 마포·성동 같은 한강벨트와 중저가 외곽이 그 자리를 메웠다. 최근 집계로 전용 84㎡ 서울 평균 분양가는 20억63만원으로 다시 20억을 넘었다. 강남의 재건축은 절세 급매와 조합원 승계 시한에 눌리고, 삼성전자 캠퍼스의 출퇴근권이라는 새로운 좌표가 영통과 동탄의 신고가를 밀어 올렸다. 서울시는 개발 기대에 편승한 도로 지분 쪼개기를 막겠다며 지목상 도로 전체를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었다. 심판의 장부가 결국 땅의 경계를 넘어 지분의 크기까지 좇는 형국이다.

정부는 세제 특례의 시계도 조금 짧게 잡았다. 조정대상지역 일시적 2주택 특례기간이 3년에서 2년으로 줄었고, 매입임대 아파트의 양도세 중과 배제에는 2027년 말이라는 기한이 붙었다. 상생임대의 거주요건 면제는 계약 종료 후 1년 안에 파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비수도권 미분양 특례는 1년 더 연장했다. 특례(特例)는 이제 무기한의 배려가 아니라 만료일이 적힌 계약이 됐다.

둠스데이 북은 세금을 거두려는 장부였지만, 그 부산물로 토지의 경계와 권리가 처음으로 기록됐다. 공유재산 총조사도 닮았다. 재정의 누수를 막으려는 목적이 공적 자산의 권리관계를 정비하고, 재난 구호의 시간을 앞당기는 공공재가 된다.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보증금의 3분의 1을 보장하는 것 또한 시장의 광기 속에서 개인이 떠안던 손실을 국가의 장부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숫자를 이렇게 늘어놓는 칼럼은 장부(帳簿)보다 현장(現場)이 늘 빠르다는 사실을 자주 놓친다. 그런데도 국가가 더 많이 세고 더 촘촘히 기록할수록, 시장은 기록이 닿지 않는 곳으로 번져간다. 강남을 조이면 외곽이 뛰고, 아파트를 누르면 도로 지분이 쪼개진다. 심판의 날의 장부가 두꺼워질수록, 장부에 없는 가격은 더 빨리 달아나는 역설. 우리는 지금 그 사이를 걷고 있다.